#8 퍼블릭아트 2017년 7월호 전시리뷰 - 라선영 개인전 '사람들'
Review 06
그래도 결국은 다 사람이다
<라선영_사람들> 전 5.18-6.17 갤러리마크
우리는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타인이 생각하는 본인과 내가 보는 ‘나’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범주 속에 시선과 관점에 따라 실로 무수한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라선영은 개인전 <사람들>을 통해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았다. 모든 이들은 정상이며 동시에 비정상일 수도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을 기준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타인은 괴물로 비칠 수 있고 반대로 그들의 시선에 비친 나 또한 일반적인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먼저 의 목(木) 조각들은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대로 평범 (Ordinary)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긴 팔을 갖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다리 네 개를 갖고 있다. 심지어 아예 사람처럼 서 있는 동물의 모습도 있는데 어떻게 이들을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가? 작가는 이런 모습을 통해 ‘보통’, ‘평범함’은 규정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일반적이라고 생각한 나의 모습이 타인에게는 어딘가 낯선, 독특하고 괴상한 존재일 수도 있으니, 무엇이 보편적인지 그 기준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는 괴상한 인형에 현대사회에서 완벽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의 성향을 투영시켰다. 사람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그들의 속내는 결코 인간이 아니라고 외친다. 그는 이 목(木)인형들을 철조 구조물과 함께 배치해 사람들뿐 아니라 도시 중심인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그가 깊숙이 묻어둔 진짜 속사람을 꺼내 보였듯이 이 도시를 구성하는 고층 빌딩의 실체도 결국은 철조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인형들은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전시됐는데, 멀리 떨어져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보면 좀 더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서 착안했다. 작가는 이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람들과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을 환기한다. 이렇게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인형들을 보며, ‘나’는 보통인 척 살아가는 독특한 존재임과 동시에 사회 기준에 맞춰진 보편적인 사람이라는 모순적인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에서 목조각만큼이나 인상 깊은 작품은 ‘Silhouette’이란 유화 작품 시리즈인데, 그 뒤에 붙은 , 등과 같은 여러 부제가 각 작품의 주제와 대상을 나타낸다. 그는 주 형상들을 과장된 모습으로 표현하고 팔, 다리 등 신체의 일부를 꺾어 움직임을 더한다. 여기에 물감을 긁어낸 듯한 붓 자국들은 이들에 역동성을 추가해 한 층 더 격렬한 에너지를 생성한다. 단순화된 이들은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 우리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실루엣’ 같은 존재지만 화면 속 그들의 활발한 움직임처럼 개개인도 각자 삶에서 특별한 힘을 내뿜는다는 것을 작가는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유화의 연장선에 있다 할 수 있는 <Silhouette; mural>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벽화와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작가가 직접 뮤럴이라 명명한 이 작품은 자유롭게 벽에 ‘늘어져 있는’ 태피스트리를 연상케 한다. 그는 캔버스를 틀에 고정하지 않고 굽이칠 수 있도록 연출해 작품의 에너지가 캔버스와 유화라는 미디어에 속박되지 않고 공간 전체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면 속의 실루엣 형상들은 마치 그곳을 벗어나고자 필사의 몸부림치다가 결국에는 화면 밖으로 뛰어나오는 것처럼 보이기에 이른다. 이는 회화 작품의 통상적 개념을 부수면서 한편으로는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체현한다.
이렇듯 라선영의 작품은 언뜻 단순하게 보이지만 복잡다단한 의미를 함유한다. 그는 우리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아 그간 자신이 본 것, 알게 된 것 모두를 조곤조곤 내뱉는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는, 하루에 수십 명도 더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다시 시선을 던진다. ‘나’에서 타인에게로 시선을 옮겨가며 점차 영역을 확장해 결국에는 세상 사람 모두를 관찰하기에 이르는 라선영. 이들 하나하나를 작업의 모티브로 삼아 그에게는 아직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글: 정송 기자
#7 3회 개인전 서문 - '욕망의 재배열 그리고 개인'
김노암(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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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색 도자기로 구운 약 500~600점의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전시장 바닥에 놓여있다. 하나의 원본에서 복제된 또는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 동일한 형태의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동화 속 해피앤딩의 주인공 신데렐라를 연상시키는 드레스를 입고 뭔가를 향해 뛰어가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여성들의 포즈는 실제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그녀들 앞에 구체적인 사실로서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한 명의 예외 없이 그녀들 모두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사이의 어떤 힘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전시장 뒤편에는 복제되지 않은 원본성을 유지하는 목조각의 여성이 홀로 서있다. 인류의 초기 태모신을 상징하는 비너스일지 모른다. 거친 자연에서 태어난 원초적인 형상을 유지하는 여인이다. 수백 명의 복제되어 재배열된 여성들과 원시인류의 유일한 여성은 상호 대척점으로 존재한다.
문명화 이전의 욕망과 문명화단계를 거치면 변형되고 분화된 욕망이 한 개인(여성) 안에 공존한다. 하나의 개인으로부터 복제된 개인들 속에서 우리는 일종의 욕망들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욕망이란 무정형의 무분별한 욕망의 세계에서 추출된 문명화된 욕망일 것이다. 사회적 동의를 획득한 욕망 말이다. 반면 사회적 용인을 쟁취하지 못한 욕망 나머지는 말 그대로 나머지로 남는다. 그것은 망각되어버린다. 사회인으로서 어른의 욕망이란 경쟁에서 살아남은 강한 욕망이며 여타 약한 욕망 또는 사회적 가치에 위배되는 광기의 욕망은 배제되고 망각된다. 그런 욕망은 망각되어야만 한다.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분류하고 관리하고 배제하는 과정에 따라 진화하고 지속한다. 개인의 욕망은 분열되어버린다. 개인은 독자적인 존재에서 이탈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권리와 의무가 작동하는 세계의 일원이 된다.
사회의 욕망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인의 욕망이란 가능할까?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전도된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의 존재방식은 무의식의 수준으로 내재화되어 의식의 합리적 판단 과정을 개인으로서 자신의 현재를 희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그 희생을 보상해줄 미래의 사회의 영속성이라는 희망이자 동시에 개인에게는 실존적으로는 기만(欺瞞)적이고 경제적으로는 기생(寄生)적이다. 욕망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개인의 추락이 반복된다.
동시대를 사는 같은 나이대의 개인들이라 해서 반드시 동일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지닌 것은 아니다. 다문화, 다원가치 사회에서는 더더욱 개인은 개인 내부로 침잠하고 환원하는 힘을 갖고 있다. 외부로 발산하는 것만큼이나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내부를 향하는 힘이 작용한다. 그러나 내부를 향하며 작동하는 힘은 어떤 형태로든 외부로 그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흔적 또는 증거를 표현하게 된다. 철저하게 고립적이며 내부로 침잠하는 개인도 분명 개인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완전히 내부로 침잠하는 힘이 가능한 어떤 개인이 있다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인은 분명 개인들의 집합 속의 개인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홀로 존재하는 개인들이 있다. 그들의 시선은 너무 멀리보거나 너무 높이 보기에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어도 그들의 정신세계는 전혀 다른 차원과 경계에 홀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흔히 공감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개인도 반드시 사회화를 거쳐야하기 때문에 개인의 신화는 반드시 비극을 반복한다. 어찌되었든 정도의 차가 아무리 크다하더라도 개인은 사회적 힘과 긴장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힘과 관계에 휩쓸리지 않는 개인은 매우 특별한 개인이며 일종의 특권을 향유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인류는 자기복제를 통해 진화해왔다. 그 과정에 세계와 현실은 해석되고 변형된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현실에서 개인은 불가능하다. 오직 개인들의 집합적 관계만이 존재할 수 있다. 홀로 높이 나는 리빙스턴은 상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한다. 잘 발달된 사회의 우아한 사교 모임에서도 냉철한 사회관계와 약육강식이 잠재한다.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사회적 관계가 밀접하다거나 뭔가 논리적 상관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도 없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자연다큐멘터리나 생뚱한 외계의 모험담을 담은 영화도 지금 현실의 사람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다. 그 반대로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면서도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깊이 다루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단지 풍경으로 존재하고 사물처럼 다뤄지며 결국엔 어느 한 개인에 대해서도 결코 이야기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반드시 계급(階級)이나 성차(性差)와 별개로 개인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나 개인의 문제는 각자 그 시기와 조건이 다르지만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다. 라선영이 말하는 개인은 어떤 개인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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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술은 결코 예술 그 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 보다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라선영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 대다수의 개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 없는 삶과 숙명을 견뎌야한다. 개인의 욕망을 반복하고 재배열하는 과정을 통한 미적 표현은 단순히 사회학이나 심리학에 머물지 않는다. 이러한 숙명을 벗어나는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적 체험과 자각 속에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는 길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예술과 신화의 세계를 떠올려보라.
상투적인 대중적 설화 이면에는 신화와 은유가 자리한다. 환상과 현실의 혼재 속에 갇힌 처녀들, 그러므로 익명성으로 개별성이 사라진 처녀들. 그리고 기념비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원본성의 여신, 마지막으로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의 작품구입이라는 교환가치의 등장으로 단순화할 수 있다. 신데렐라의 신분상승 신화와 그 신화를 반복하는 욕망, 구원이자 현실의 탈출구인 배우자 찾기 또는 신경쇠약 직전의 처녀가 느끼는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과 욕망, 학습된 사랑의 구원, 기계화된 욕망의 출현.
인간의 욕망은 빈곤과 풍요 사이의 운동을 반복 순환한다. 욕망은 마치 양파껍질처럼 표면으로만 존재한다. 표층과 심층이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공존한다. 욕망의 운동은 외부로 또는 내부로 회전하며 겹치는 파동의 형태로 작동한다. 전시장의 수 백 명의 여성들은 욕망의 실체를 찾는 과정에 나타나는 분할된 형태 또는 무한한 파동의 은유를 떠올린다. 욕망이자 욕망들이 동시에 구현된다.
사람들의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단지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온몸을 던져 뛰어든 사람에게는 삶은 희극과 비극을 구별할 수 없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예술에서 표현형식과 주제의식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불균형은 그러므로 본질적이다. 미적 대상이라면 복합적인 삶에 대해 조금은 다른 가치, 다른 관점, 다른 출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구체적인 형상이 등장하면서 사람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있고, 사람이 결코 등장하지 않은 채 말거는 작품이 있다. 구체적인 표정을 표현한 작품이나 표정이 모호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이지 불명료한 상태의 작품이나 그 작품이 지시하는 길은 사람에 대한 것들이고 삶에 관한 것들이다. 예술은 사람과 사람의 삶의 뒤에 가려져 있고 아주 긴 시간 속에 드러난다. 진실한 환영이거나 위악적인 현실성으로.
이런 것들이 전시의 큰 줄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미세하고 다양한 갈래의 해석의 길을 모색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에고는 성장과정에 형성된 상상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한 개인의 삶은 단 한번만 가능하며 지나간 시간은 되돌리지 못하다. 우리는 이 행복이 꿈이 아닐까, 또는 이 비극적 처지가 꿈이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전시장은 정신분석과 메타심리학의 전장(戰場)이 된다.
글: 김노암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6 세계일보 2016년 6월 4일 '편완식이 만난 사람 - '인간'을 조각하는 라선영 작가'
30㎝ 남짓한 인간 목각 군상들이 널브러져 있다. 인형놀이를 위해 모아놓은 장난감 같다. 색으로 분장을 하기도 했다.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조각가 라선영(29)의 평창동 작업실 풍경이다. 무겁고 거대할 것이란 통념을 깨버리는 공간이다. 한 디자이너를 떠올리게 해줬다.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촉발시켰던 이탈리아의 거장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사람이 최고”라고 했다. 멘디니는 일찍부터 자신의 디자인에 인격성을 부여해서 디자인이 단지 무생물적 도구가 아니라 생명체와 같은 존재로 다가가게 했다. 라선영의 목조각이 그렇다.
“사람들을 웃기기도 울릴 수도 있는 엄청남 힘은 바로 사람의 형상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멘디니는 사람의 이름을 딴 ‘안나G’라는 와인 오프너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인간형상을 한 디자인으로 인격성을 부여해 지금까지 롱런을 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인형은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 발견되었어요. 기원전 2000년쯤 어린아이의 묘에서 당시 복장을 한 목각 인형이 함께 출토되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선사시대부터 존재한 인형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건인 것이지요. 저의 목조각도 그런 관점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인형이 어린아이 때부터 성장기의 친구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다. 인형은 풍작을 기원하거나 역병을 떠맡는 제례 기능을 하며 세계 각지에서 그 지역의 문화를 담았다.
“인형들이 인간 목조각을 통해 이 시대의 문화 등 시대의 초상을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어요.”
그가 나무라는 재료를 택한 것은 돌과 더불어 인간이 가장 먼저 사용한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만들기의 본능을 깨어주는 재료라는 얘기다.
“우리는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집을 짓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가구도 만들고 옷도 지어 입었지요.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무엇을 만들까?’라는 고민은 사라졌지요. 대신 ‘무엇을 살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지요.”
그는 미술대학시절에도 만들기 본능을 충족할 수 없었다. 컴퓨터 등 첨단 도구들이 손을 자꾸만 묶었다. 여성 작가지만 그가 지금도 나무를 직접 손으로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이유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삶을 구성하려고 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만들기 본능이지요.”
그의 조각은 작다. 그러기에 무릎을 꿇고 바라봐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인간을,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멘디니의 작은 성당이나 보석기둥을 연상시킨다. 전시장에서 작은 것들이 숭고하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그 속을 거닐다 보면 삶의 깊은 내면까지 살펴보게 된다.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 영혼의 평온함까지 느끼게 되지요. 영적인 세계를 만나는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기능성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오브제들을 많이 디자인한 멘디니의 의도를 가슴속으로 이해하게 됐다.
“크기에 대한 과장과 축소,다시 말해 때로는 아주 크거나 아주 작게 만들어 생소한 느낌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일반적인 사물과 인간을 소품이나 기념비적 조각품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고 한다. 명상적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어른들을 위한 인형을 만드는 것일 게다. 목각인형에는 태어나서 자란 서울 사람들의 모습이 많다. 다섯 개의 학원가방을 들고 있는 엄마와 초등학생,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군상들, 깃발 든 관광가이드, 야구루트 아줌마와 철가방 아저씨, 예수 천국 피켓과 스님, 미국인 관광객, 택배기사 등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기어오르는 우리의 자화상도 보인다. 유학생활을 했던 런던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 성향과 상관없이 같은 크기로 70억 개의 목각인형을 만드는 것이 목표예요. 70억 지구인이 살아가는 70억 개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조각에서 인간의 육체는 특별한 주제다. 조각가는 인체를 삼차원적 형체로 인식하여 하나의 물체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한다. 인체 조각은 동시대 인간들이 공유하는 인간에 대한 정서나 직감을 형상화하게 마련이다. 그 사회의 미감을 드러낸다. 그 유명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은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기묘한 신체 비례를 갖지만, 당시 미감에서 보면 과장된 엉덩이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이상적 여성의 신체 비례를 재현했다. 구석기인들이 11㎝ 남짓한 조각상으로 풍요와 출산의 여성상을 남겼던 것이다.
“저는 관람객이 작품을 내려다보고 들여다보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관람객이 신처럼 전지적 관점으로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작품 배치도 역할놀이하듯 해 관람객이 인간을 염탐하고 통제하는 듯 느끼게 유도하지요.”
그는 23일부터 7월 22일까지 열리는 카이스갤러리 초대전에선 바비인형 같은 신데렐라 신부 모습의 작품을 선보인다. 욕망의 화신이다. 바비인형에 대해선 두 가지 평가가 있다. 용기와 자신감, 능력으로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성장기 소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섹시한 몸매를 강조, 외모 중심의 잘못된 여성관을 심거나 눈 크고 늘씬한 서구적인 외향만 미인이라는 왜곡된 미의식을 조장한다는 부정적 평가도 받고 있다
“저는 인형을 시대의 염원, 욕망, 두려움 등을 반영하는 도구로 생각해요. 오늘날의 인형은 ‘인형 같은’ 결함 없는 도시적 외모와 영원한 젊음, 완벽한 생활의 모델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형들은 주로 캐스팅을 통해 복제로 생산되고 있지요.”
그는 나무로 만든 신데렐라 신부를 틀로 삼아 600개의 도자기 인형도 만들었다. 전시장에서 공산품으로 팔 예정이다. 포장은 양파 망에 담아주는 것으로 정했다.
“도자기를 선택한 것은 욕망은 깨어지기 쉽고 발길에 차이도록 흔한 것으로 변모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어서지요.”
사람들의 구매 행위로 하얗게 반짝이는 도자기 신부들은 이빨 빠지듯 사라지게 된다. 남는 것은 틀이 돼준 목조각뿐이다. 본질만 남게 되는 것이다. 퍼포먼스식 전시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분명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똑같은 600개의 도자인형임에도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려 들 겁니다. 양파껍질처럼 중첩된 얄팍한 욕망은 아무리 벗겨내도 알맹이 없이 끝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인체 조각으로 인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 가는 조각가 라선영은 이화여대에서 조소과를 종업하고 영국(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했다. 서울과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예술가는 상상력의 성직자’라는 말을 새기며 오늘도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조각한다.
글: 편완식 기자
#5 월간미술 2016년 6월호 'New face 2016 - 인간을 말하다'
더 이상 ‘조각’이라는 장르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설치, 영상 등이 대세를 이루는 지금의 미술계에서 나무로 인체 형상을 제작하는 라선영의 작업은 조금 특별해 보인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작업은 아니다. 어쩌면 나무로 만든 인물조각이 전통적이라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뿐이다.
인간의 다양한 행태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70억명의 인물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나무를 깎는 행위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가장 잘 맞는 표현방식이다. 나무 특유의 따듯함도 인물 형상과 잘 어울린다. 그녀가 만든 인물조각은 특별한 기교도 디테일도 없다. 하지만 채색 작업을 통해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여중생 등 조각 하나 하나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작가는 나무 특유의 물성을 압도하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사람 형태라고 인식할 만큼만 깎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든 작품은 그녀의 평생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 군상은 그 시대의 삶이 풍경을 반영한 거대한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런던>, <서울, 사람> 시리즈가 주변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풍경이라면 <빔(Beam)>, <타워>, <벽(wall)> 시리즈는 인간의 내면세계, 특히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인물조각은 당대의 열망 또는 염원을 그대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석기시대 다산의 상징이었고, 거대한 동상이 다수 제작된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전달이 중요한 목표였다. 30cm 남짓한 크기로 바닥에 낮게 배치된 라선영의 목조 군상은 신이 사람을 내려다보듯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부여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작가에게 조각품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그것들이 연출된 상황도 중요하다.
6월 카이스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에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는 모두가 주목받고 싶어하는 동시대 세태를 담아내기 위해 목조로 제작한 신부 형상을 도자기로 대량 제작했다. 깨지기 쉬운 재료인 도자기는 현대인의 연약한 자아와도 맞닿아 있다. 도자기로 만든 신부 부대를 바닥에 깔고 천장에는 반짝이는 종이로 만든 낙하산 부대를 매달을 계획이다. 능력이나 자질 없는 낙하산 인사처럼 이들 형태는 반짝여서 눈에 띄지만 옆에서 보면 제대로 안 보일 만큼 얄팍하다. 이처럼 동시대 삶의 모순을 담아내다 보니 라선영은 목조각이 아닌 새로운 표현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재료적 특성, 표현방식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글: 이슬비 기자
#4 매거진 우드플래닛 2016년 5월호 - '인간에 대한 조각 보고서'
조각가 라선영
인간에 대한 조각 보고서
발밑에 놓인 사람을 만나 적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면 몹시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서둘러 어느 젊은 조각가를 만나야 한다.
글 육상수 | 사진제공 라선영
우리는 눈앞의 현상을 사실 혹은 진실로 수긍하면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조각가들은 그 사실과 진실 너머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매일 조각을 한다. 현상 이면의 본질을 찾아보려는 의미일 텐데, 그렇다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고 현상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포착하는 작업을 조각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조각은 물질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의미를 암시하는 존재성을 갖는다. 그래서 조각가는 의무처럼 세상을 조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각에 대한 어느 아티스트의 수사>
‘타인의 얼굴이야말로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 소재’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Levinas)의 정의에 따른다면, 얼굴에는 문자화 되지 못한 수많은 중의(重義)가 담겨 있다. 따라서 조각가가 얼굴을 조각했다면 거기에는 역시 암시, 역사, 기운, 형식, 이력 등과 같은 난해한 의미들이 함께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조각가는 이 난해함을 해독하는 예술가이다.
30세의 여성 조각가 라선영이 빚은 군집의 인체 조각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는 틈새로 의문과 긴장이 숨어 있다. 사람이 조각이면서, 조각이 사람인 그녀의 30센티미터 남짓한 조각들은 관람객의 바짓가랑이 아래에 멈춰 서 있다. 그 조각들을 보면서 우주에서 본 지구가, 동네 문방구의 지구본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일별했다면 그것은 우리 이웃에 대한 무지와 경멸의 태도이면서 스스로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기는 것이다.
라선영은 ‘군중’에 대한 이야기와 가능성을 시리즈로 풀어가기 때문에 ‘서울, 사람’ ‘광화문 사람들’로 이어지는 사람 조각 연작을 전지적 관점으로 탐색해야 그의 작품세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라선영의 작업은 조각이기 이전에 결국 주위 사람들에 관한 관찰 보고서이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단순한 형상의 탐색이 아니라 깊은 관심과 애정에서 출발해 사람이라는 객체의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조형의 여정이다.
비관주의자는 보이는 모든 것을 허상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지만, 라선영의 근원에 대한 긍정의 시선에는 몸살 뒤 원기회복을 통해 얻는 치유의 고통을 목격하고 예방하고픈 갈망이 서려 있다. 라선영의 두 번째 개인전 ‘BEAM’은 마천루를 향해 기어오르는 가당찮은 인간의 욕망을 고발하는 것이면서, 우리가 소망하는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전진하지만 정작 그렇게 도달할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표현한다. 타자란 까닭 모를 암흑의 존재이면서 무한성의 대상이기도 하다. 타자를 부정하는 것은 실체에 대한 반기이지만 긍정은 실존을 위한 시그널이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의 이런 의도를 놓쳐 선 안 된다.
<70억 개의 얼굴, 70억 개의 세상>
라선영은 “우리는 고작 100년 전의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으며 지구촌이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도 지구 반대편에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다른 말을 쓰며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끊임없는 전쟁과 변화, 그리고 다양성의 폭풍 속에서 인류는 살아 왔다”고 말하면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항상 세상의 중심은 ‘나’였음을 진단한다. 또한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결국 타인에게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것은 타인이라는 존재의 시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 칼럼에서 밝혔다. 라선영이 보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나의 마음대로, 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70억 명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70억 개의 세상이 중첩된 곳이다. 그리고 라선영은 “너무나도 다른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이 좁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재앙”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라선영의 진단과 해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라선영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야 존재가 구성되고 존재의 이유가 확립되기 때문에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자각한다. 그리고 이 존재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곧 라선영 조형 언어의 출발인 셈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면서 타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아를 발견하기 전에 타인을 먼저 단정하는 것이 우리들의 습관적 행위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내 앞의 실체를 통해 자신의 부재를 알아채 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타자의 얼굴보다 자신의 얼굴이 더 낯선 이유가 그래서다. 작가는 이런 비정한 현실을 한 치라도 교정하기 위해 부단히 세상을 직시한다. 태생적 직관력을 도구로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도 작가의 몫일 것이다. 라선영의 조각에 담긴 ‘무엇?’과 ‘ 왜?’에 대한 집요한 질문은 작가의 직관력이 포착한 존재의 표상이기도 하다. 바닥에 엎드려 조각의 얼굴을 맞대어보면, 조각들은 저마다의 얘기를 쏟아내느라 분주하다. 나와 당신은 누구인가요, 왜 사는 건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따위. 전시장 바닥에서 그들의 얘기에 귀를 귀울이다보면 세상에 대한 방관과 무정함을 돌이켜 보게 된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주나? 곧 기운이 쇠락하지만 작가에게 의지해도 될 지를 문의한다.
<근원적으로 사랑하는 법>
라선영은 인간을 탐구하는 조각가이다.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세상을 연마하고 있다. 절대라는 고독의 늪에서 그렇게 간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듬어가면서, 삶의 텍스트를 조각한 더미 속에서 완전한 결정체를 찾아가길 소망한다. 서른 살 작가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식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든, 돈오점수(頓悟漸修)든 더 큰 별이 되어 지구의 삶을 조망할 것으로 믿는다.
라선영은 우주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냥 있을’뿐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고백한다. ‘예술가는 상상력의 성직자’라는 말처럼 그녀는 매일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조각한다. 그것도 무려 70억 명의 인간을, 70억 개의 지구를, 70억 개의 세상을, 70억 개의 삶을 조각할 계획이다. 이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도, 불립조각(不立彫刻)도 아닌 무모한 선언일 수도 있다. 굳이 이 황당한 계획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 상상의 원초적 근거가 궁금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아직 때가 아니라 단정했다.
12월 초, 눈 흩날리는 날에 강원도 정선의 카지노 근처를 얼쩡대는 라선영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재물과 영혼을 강탈당한 도박꾼들의 민낯을 만나보기를 권고한 때문이다. 삶의 직격탄을 가슴 한 가운데에 피격 당하길 강요한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과도한 요구를 청한 것 같아 무례했지만, 서른 살의 라선영 작가에 대한 무한한 기대의 표식쯤으로 여겨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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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영 인체 조각으로 인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 가는 조각가다. 이화여대에서 조소과 학사를, Royal College of Art에서 Sculpture MA를 취득하고 서울과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다. 코너아트스페이스, 한화 63스카이아트뮤지움, 카이스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문화역서울284, 서울특별시청, 카이스갤러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서 단체전을 가졌으며 한화작가지원프로그램, 서울예술재단에서 수상하였고 이화여자대학교와 수원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글: 육상수 (매거진 우드플래닛 대표)
#3 라선영 개인전 "BEAM" 전시 서문
30센티미터 남짓한 인간을 목각 군상으로 표현하는 라선영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무한한 이야기와 가능성을 시리즈로 하나 하나 풀어간다. 영국 런던 Royal College of Art 시절의 “London” 시리즈로부터 시작된 Symphony 연작은 “서울, 사람”, “광화문 사람들” 등 작가의 주변을 타고 돌며 이어진다. 마치 살아 움직이고 재잘대는 듯한, 하나 하나 깎아 낸 이 작은 사람들은 신이 그러하듯 우리 자신을 전지적 관점으로 탐색하도록 유도한다.
라선영의 두 번째 개인전 BEAM은 어디론가 향하는 일련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이 열심히 향하는 곳은 어디이며 그 마지막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끝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불을 다루며 시작된 금속의 제련이 인류의 유전자 방향을 바꾸었다. 1779년부터 사용된 철골구조는 1889년 에펠타워를 대표로 근대의 마천루를 탄생시키며 인간 유전자의 질주 본능에 불을 붙였다. 차갑고 무거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쭉쭉 뻗은 빔은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과 그 안에 가득 찬 사람들, 물불 가리지 않는 수직상승 욕구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80년대 아시아 최고(高) 빌딩이었던 63빌딩의 건립에는 어떤 꿈이 담겨 있었을까. 지금도 서울의 강산을 뒤덮으며 바쁘게 하늘로 뻗는 사방의 저 건축물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어디이고 누구와 함께 어디를 거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
글: 라선영
#1 월간 미술세계 2014년 7월 통권 356호
Monthly Art Magazine July 2014, #356
Art & Essay
70억의 오케스트라
*공존재 Mitsein; Being-with
**그냥 있었다. 모든 것은 그냥 그렇게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물론 변화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도 ‘있음’의 일부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세계대전이라고 불리우는 전쟁부터 지역 간의 전쟁, 집단 내의 내전, 정당 간의 싸움, 가정 안의 싸움까지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다. 그 와중에 세상은 (나름) 눈부신 기술의 발전으로 나날이 변하고 있어 우리는 고작 100년 전의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으며 세상이 지구촌이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에도 지구 반대편에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다른 말을 쓰며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끊임 없는 전쟁과 변화, 그리고 다양성의 폭풍 속에서 인류는 살아 왔다.
세상의 중심은 ‘나’이다. 우리 하나 하나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 ‘나’의 마음대로,‘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입장의 차이마다 성격마다 외부의 환경을 대하는 인간의 시각은 변화한다. 내가 아는 하늘색이 알고 보니 너에게는 붉은 색일지 누가 아는가. 확대하면 지구에는 7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것은 곧 완전히 다른 70억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서로 너무나도 다른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이 좁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재앙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것은 타인이라는 존재의 시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 가장 힘센 군주가 되고 싶은가 하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고 싶거나 또는 동네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이길 바라거나 애인에게 가장 멋져 보이고 싶거나. 70억 사람들은 서로를 통하여 서로를 인식하고, 부대끼며 자신의 존재를 외쳐가며 살고 있다. 크고 작은 집단을 통하여 소속감을 확인하고 가족과의 사랑을 통하여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여기서 잠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주 저 멀리서 지구를, 그 역사를 바라보자. 지구는 언젠가부터 거기에 있었고 거기에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붙여 그것을 기준으로 이 땅에 우리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적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지구라고 우리 스스로 이름 붙인 ‘특별한’ 별의 표면에 붙어 아우성치는 우리들의 일방적인 관점일 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나’ 조차도 결국 그저 무한의 우주에 박힌 어떤 한 별에 기거하는 미미한 존재 중 하나이다. 손오공이 날아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그 안에서 누구와 누가 어떻게 치고 받고 싸우건 결국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냥 있을” 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인류 자신보다 더 큰 관점을, 어마어마하고 두려운 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했다. 무한의 존재가 우리를 내려다 보며 마음 구석구석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그 두려움. 그 두려움이 옷매무새를 바로잡게 만들고 내 친구의 아내를 탐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만큼 신이라는 존재와 그의 관점, 그리고 거기서 오는 경각심이 없어져 갔다. 다행히도 그럼에도 신의 눈에는 여전히 인간은 그저 인간이다. 인간들의 이기와 배신은 찻잔 속의 폭풍일 뿐 신은 더 큰 그림을 내려다 본다.
인간 세상은 70억 주자의 오케스트라이고 그것을 지휘하는 것은 신이거나 우주의 힘이거나 자연의 신비이다. 오케스트라에서 더 중요한 악기는 없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그 음악은 완성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 하나의 주자이고 악기로서 각각이 다른 음색으로 다른 곡조를 연주한다. 옆 주자의 소리를 들어 가며 내 소리를 조율한다. 너무나도 다른 부분 하나 하나가 모여 결국에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한 번쯤은 눈을 감고서 신의 관점을 상상하며 내 두 발이 딛고 선 이 땅을 둘러싼 대기를 들이쉬어 보자. 나무 한 그루와 숲을, 그 숲을 머금은 대지를, 대지를 품은 이 별을, 그 별이 떠도는 우주가 울리는 장대한 오케스트라를 들어 볼 때에 그 순간 세상이 좀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글: 라선영
#2 1회 개인전 서문
서울 사람: 라선영 첫 번째 개인전
가장 오래된 인형은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BC 2000년경 어린아이의 묘에서 당시 복장을 한 목각 인형이 함께 출토되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해온 인형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건이다. 인형은 어린아이 때부터 성장기의 친구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형은 풍작을 기원하거나 역병을 떠맡는 제례 기능을 하며 세계 각지에서 그 지역의 문화를 담는다.
라선영은 첫 개인전 <서울 사람>에서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목각인형 연작을 소개한다. 다섯 개의 학원가방을 들고 있는 엄마와 초등학생, 깃발 든 관광가이드, 야구루트 아줌마와 철가방 아저씨, 예수 천국 피켓과 스님, 미국인 관광객, 택배기사 등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각인형에 담는다.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 성향과 상관없이 같은 크기로 70억 개의 목각인형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 작가는 말한다. 이 연작은 70억 지구인이 살아가는 70억 개의 세상을 창조한다.
조각에 있어서 인간의 육체는 특별한 주제다. 조각가는 인체를 삼차원적 형체로 인식하여 하나의 물체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한다. 인체 조각은 동시대 인간들이 공유하는 인간에 대한 정서나 직감을 형상화하며, 그 사회의 미감을 드러낸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은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기묘한 신체 비례를 갖지만, 당시 미감에서 보면 과장된 엉덩이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이상적 여성의 신체 비례를 재현한다. 구석기인들은 11cm 남짓한 조각상으로 풍요와 출산의 여성상을 남긴다.
라선영은 서대문 재개발 현장에서 주워온 벽 조각 위에 목각인형들을 낮게 배치한다. 관객은 신이 인간을 내려다 보듯 작가의 <서울 사람>을 내려다 본다. 공간과 부피를 지각하는 방식은 심리적인 문제이다.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관객은 전지적 관점으로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모습을 관찰한다. 목각인형을 사용한 역할놀이를 통해 작가는 서울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며 관객은 이를 염탐하고 통제하는 듯 느끼게 된다.
목각인형 연작은 라선영이 영국 유학시절에 작업한 <심포니: 영국사람>에서 출발하였다. 여왕, 근위병, 축구 선수, 바텐더를 같은 크기로 제작하고 배치한 이 작업은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그 소재를 서울사람으로 가져온다. 도시와 사람은 바뀌었으나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권력 관계에 대한 주제는 연결점을 갖는다. 라선영은 가족, 도시, 국가와 같은 공동사회 안에서 다양한 인간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육체의 충돌과 그 풍경을 담는다.
글: 양지윤 (코너아트스페이스 디렉터)
작가 소개
라선영 (b.1987)은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작가는 목각 인형으로 유명인 또는 비유명인을 표현한다. 현재 런던과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루프탑 크릿>(닥터스트레인지러브, 2014), (화이트포스트갤러리, 런던,2014), <대중의 새발견>(문화역서울284,2013), (Departure Gallery, 런던, 2013), <두드림에서 오는 상상>(국립아시아문화전당,광주, 2011)등 단체전에 참여했다.
"Symphony Seoulites" - Sun Lah's first solo show
The earliest documented dolls go back to the ancient civilizations of Egypt, Greece and Rome. Wooden dolls have been found in the ancient Egyptian tombs of children, which suggest the very early existence of childhood dolls. Historically, wooden or clay dolls have been very much involved with human life. They have not only been used as toys, but also in magic and religious rituals throughout the world, often embodying local culture.
Sun Lah's first solo exhibition - "Symphony Seoulites" - introduces a series of doll size wooden figures. The wooden sculptures represent ordinary people in Seoul - such as an eager mother and her child, stressed men, “quick” delivery guys, conscripted soldiers, policemen and so on. In contrast to the traditional practice of figurative sculptors, the artist has carved her figures to be the same size regardless of the social status or the personal preferences of the models. The "Symphony" series creates seven billion worlds for each of the seven billion people on earth.
The human body has always been special in the world of sculptors, however devotion to recreate the human body in various ways has not been the sole function of the artist. Figurative sculptures contain sentiments and intuitions shared by contemporaries and illustrate the sense of beauty for the age. The Venus of Willendorf may look distorted to modern people but it represents an ideal female shape for the time with an exaggerated posterior and voluptuous breasts. The Paleolithic sculptor left the ideal female body of the era in an 11 centimeter tall figurine that symbolizes fertility and fecundity - the most worthy features of his own time.
Sun Lah displays the wooden sculptures on pieces of building waste taken from a redeveloping area in the center of Seoul. As the artist places the sculptures down low, the audience can look down upon “Seoulites” as God would look down upon human beings. The way we perceive a certain space and volume can be altered as we change our views. In this white cube gallery (CAG), the audience is able to observe the little people from an omniscient viewpoint. The instinctive will of domination and control hidden in every audience member's mind is gratified as they carefully spy their own neighbors.
"Symphony Seoulites" is part of the series of work entitled "Symphony". The first part of the series - "Symphony London" - was created when the artist was at the Royal College of Art in London. The figures in "Symphony London", including Queen Elizabeth, Buckingham Palace guards, a footballer, and a TFL bus driver, are equally displayed on an artist-made parquetry floor. Now Lah extends the series to reach her own hometown of Seoul in her first solo show "Symphony Seoulites" at Corner Art Space. Even though the place and people have changed, the theme continues . . .
Ji-yoon Yang (Director Corner Art Space)
CV
Sun Lah (born in 1987) was awarded a BFA at Ewha Women’s University (Korea) and an MA in Sculpture at Royal College of Art (United Kingdom). Lah presents groups of ordinary people or public figures as representative features of contemporary society using a form of wooden figurative sculpture. Sun Lah currently lives and works in Seoul and London. She has participated in many exhibitions including "At Home Salon 2014" (Ascot, UK), "Rooftop Crit" (Dr Strangelove, Seoul, 2014), "Springboard" (White Post Gallery, London, 2014), "The Public’s Extended" (National Culture Station Seoul 284, Seoul, 2013), "Open Plan - Strategies and Tactics" (Departure Gallery, London, 2013), "Visual Contents Designer at Imagination from Drumming" (National Asian Culture Complex, Gwangju,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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